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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쉼.그리고 프라나
새벽4시 .
삶의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삶의 무게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물먹은 솜이불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캔버스에 붓을 드는 과정은 매 순간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혼돈의 카오스속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한 한 인간의 존재감. 가쁜 숨을 들이 쉬며 쉼 없이 달려왔으나, 매 순간 존재는 찰라의 점일뿐.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자신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던 어느 노승의 말씀처럼,
자신의 존재를, 화면에 수없이 반복되는 점을 찍는 행위를 통해서 확인하는 과정이다.
과연 지금 여기는 어디인지? 가끔 현존감이 느껴지지 않아 호흡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새벽의 어스름같은 시간들.
오토랑크는 예술의 최초의 형태는 인간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집단적으로 부정해 보려는 노력이었다고 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체의 자궁 안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심리적 외상, 즉 탄생의 공포를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 탄생으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의 시기, 즉 진정한 개체화가 시작되고, 그 후 또다시 이 정체성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즉 죽음에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창조란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일루젼, 즉 치유적 거짓말, 살기 위한 거짓말이다. 작업을 하는 과정은 내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 같은 것이며, 이를 프라나(산스크리트어로 생명력을 뜻함)라는 단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중국 철학이나 의학에서 말하는 기(氣)와 유사한 개념이며 정과 신 사이의 매개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프라나는 안으로 받아들이는 에너지로서 가슴에서 호흡으로 생명 에너지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즉, 죽음의 공포의 반대편에 있는 상징이다.
혼돈을 정리해 줄 수 있는 반복적인 수행과정은 이러한 프라나의 에너지를 추구하고 있다. 우연과 반복이 이루어내는 생명력과 작품에서의 강박증적인 요소는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며 스스로 생명체의 근원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하는 과정이 된다.
백색의 캔버스에 내가 살아온 시간들,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나의 시간을 무수한 색점으로 채워가는 과정은 인고의 과정과 더불어 무한 희열을 안겨준다. 작품의 외형은 추상이지만, 그 안에 담긴 하나하나의 점들은 생명의 최소단위로서의 세포를 의미하며, 점과 점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점들의 집합이 일궈내는 유기적인 형상으로 변주되고 중첩되고 심화되며 궁극적으로는 치유의 순간을 지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