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나는 그림을 시작할 때 어떤 의미 있는 가치를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림에는 무엇보다 회화적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는데 마치 보석과 같이 견고하면서도 강렬한 조색으로 자연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재해석하여 독창적 기법으로 재창조하거나 사람들의 일상 속에 벌어지는 유의미한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 또는 인간감성의 편린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차용하여 화면에 재구성함으로써 심미적 가치와 철학적 사유를 담아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 움직이는 순간의 역동적인 동작에는 완벽히 균형잡힌 긴장감이 빚어 내는 극도로 아름다운 심미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림은 마치 찰나의 순간에 동결된 인생처럼 함축적이며 삶의 궤적속에 뚜렷이 기억되는 한 장면처럼 뇌리에 각인된다. 화가는 자연이라는 절대적 존재와 불완전한 인간사회가 초래하는 무수한 현상들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적 가치와 심미적 요소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예술적 환원의 대상을 포착하여 창작을 구상하고 작업하여 마침내 고유의 장면을 구현함으로써 예술적 가치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한다. 그 그림을 마주한 관객들이 시각적 경이로움과 함께 자꾸만 보게 되고 깊이 매료되면서 화가의 질문에 동화되어 스스로 사유하고 마침내 그 장면을 사랑하게 될 때 화가는 비로소 행복해질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현상들로 부터 유의미한 가치를 찾아내고 재창조하기 위해 화가는 마치 소실점은 있으나 영원히 평행한 철로와 같은 시각적 감성과 논리적 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한다. 자연의 절대적 아름다움과 인류의 다양한 삶에 대해 심미적 관점으로 고찰하면서 보여지는 존재와 현상들을 회화적 대상으로 재해석하여 기존의 양식을 응용하거나 스스로 새로운 미학적 형식을 만들고 또 탈피를 거듭함으로써 감성과 이성에 대한 주관적 편해(偏解)를 자정(自精)하는 수 많은 과정을 거쳐 결국 심오하고 독창적인 회화로 진화하고자 몰두한다.
‘향수(Nostalgia)’
어느 시골마을의 농가 부엌에서 흔히 보았던 밥짓는 풍경은 고향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어린시절 나는 해질녘 부엌 아궁이 앞에서 형제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고 맛있는 누룽지를 기다리며 아궁이 속 타오르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즐겼다. 장작불이 주는 따스한 기운을 온몸에 받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꽃이
만들어 내는 신비로운 화무(火舞)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마치 내 영혼이 불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듯한 몽환적인 그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투우(Bullfighting)’
현대사회는 동물과 인간을 끊임없이 경기장에 소환하고 경쟁을 부추기며 강요와 회유를 반복하여 서로 싸우게 한다. 투우장에서 인간을 대신해 싸우고 있는 소의 힘겨운 눈빛에는 승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지배자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다. 거기에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나아 갈 수도, 물러 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고달픈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과 끝없는 대립만이 존재한다. 권력자의 지배하에 승리자의 욕망, 패배자의 숙명이 교차하는 투우장에서 하나같이 화려한 성공과 우월한 우두머리를 꿈꾸며 역동적으로 맞서고 있는 싸움소들은 영원히 경쟁에서 벋어 나지 못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 인류의 슬픈 자화상이다.
‘팬데믹(Pandemic)’
21세기 인류에게 닥친 COVID-19는 인류의 무절제한 욕망이 빚어낸 자기-파괴적 재앙이다.
돈과 권력, 쾌락을 쫓아 진화해 온 인류가 어리석은 탐욕으로 돌이킬 수 없는 몰락에 직면하였을 때 신에 대한 구원의 맹신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테러와 전쟁을 반복하는 국가와 종교, 강자의 지배적 욕망과 약자의 숙명적 희생,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본능,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는 지배자, 소환되는 인간과 동물들, 명예와 탐욕을 움켜쥐고 나락으로 추락하는 권력자들, 넘치는 풍요속에 향락에 길들여진 인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욕망과 쾌락의 샘, 교활하게 진화해 온 배타적 카르텔은 인류의 양극화를 심화하고 격렬한 다툼으로 치닫게 하여 결국 불행한 종말을 예시한다. 그러나 신의 전령인 비둘기는 안타깝게 지켜볼 뿐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이 그림은 ‘노아의 방주’ 를 모티브로 하여 정신적 고통속에 약 4년간 심혈을 기울여 그렸다.